제목 | 이달의 청렴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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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6-02-01 | 조회수 | 123 | |
▶ 신정승 구정승 - 구치관◀ 구치관(具致寬, 1406-1470)은 조선 세조때의 영의정으로 문신으로서는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청백리의 표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23세인 1429년(세종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성격이 정직하고 아첨하기를 싫어해 10년이 지나도록 하위직으로 변방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조에 의해 일약 좌승지로 발탁된다. 이후로 평안도절제사,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66년(세조 12)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여진족이 변경을 자주 침범해 오자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 되어 직접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워낙 정직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일체의 청탁을 배격하였기에 세조가 그를 일컬어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칭송할 정도로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다. 구치관에 얽힌 유명한 일화로 '신정승 구정승'이야기가 있다. 구치관이 새로 우의정에 임명받았을 때 영의정이었던 신숙주와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두 사람을 세조가 직접 불러 술상 앞에 앉혔다. 왕이 "신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왕은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왜 신(申)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이번엔 "구정승"이라고 불렀다. 구치관이 대답하자 "구(舊)정승을 불렀는데 왜 구(具)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다시 "신정승"을 부르자 아무도 대답을 못하니 "왕이 부르는데 신하가 감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둘 다 벌주를 마셔야 했다. 그렇게 웃으며 한잔, 난처해하며 한잔 하는 진퇴양난의 술자리였지만 결국 두 정승의 어색한 관계도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지만 구치관은 초심을 잃지 않고 늘 용모와 행동을 바르게 했다. 어떤 이익과 세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였으니 인사업무를 관장하는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을 때조차 집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행여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관례상 받아줄만한 사람이라도 아예 배제하였다. 심지어 대문장가로 통하는 서거정도 그의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거쳤다고 한다. 재능만 믿고 일에 소홀한 점이 있었는데 구치관에게는 결코 '대충대충'이 통하질 않아 항상 정신 차리고 일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정작 구치관은 생업은 돌보지 않아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어 왕이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보냈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의 외진 시골마을에 가면 지금도 영의정 구치관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 오래된 고목이 보이는데 바로 구치관이 직접 심은 느티나무로서 광주광역시 지정 보호수라고 한다. 그러나 눈에 띄는 구치관의 유적은 거기까지일 뿐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의 묘역으로 가는 길에는 작은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질 않았다. 마을에서 만난 후손에게 물어 간신히 "구치관 할아버지" 묘소로 가는 길을 찾았지만 경운기 한대 들어가기 힘든 좁은 길이다. 요즘 '영의정 게임'이라는 것이 그의 소재도 되곤 하지만 사실 '영의정'은 일국의 총리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절대 고위직이었다. 그런 표현조차 무색하게 묘소는 소박하기만 하다. 어지간한 세도가의 묘역이라면 으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당조차 보이질 않으니 검소하지만 정신만은 꿋꿋한 청백리의 혼이 느껴지는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