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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달의 청렴인물
작성일 2016-03-03 조회수 108
▶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사물은 청백뿐이다.◀
(류 관)
1346년(고려 충목왕 2년) 황해도 문화현에서 삼사판관 류안택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하정이다. 처음에는 학자가 되려 했으나 아버지의 말씀(나라가 어렵고 백성이 괴로울 때 일수록 올바른 벼슬아치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뜻을 바꾸어 26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그 이후 목민관으로 황해도 봉산 군수,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세종 때에 청백리로 뽑히고 79세의 늦은
나이에 세종대왕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껴 우의정을 역임하게 된다.
88세에 임종하였을 때는 세종대왕은 친히 문무배관을 거느리고 흥인문에 나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춘추관 지사로서 <태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고려사를 개찬하였고 평생 학문에 힘써 경사에 밝았으며, 시문에 능했다.   
 
청백리로서 류관은 우의정인데도 비가 새는 초가집에 살았다. 나라에서 받은 녹은 다리를 놓거나 길을 넓히는 일과 동네 어린이들의 먹과 붓 값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성품을 아껴 세종대왕은 종신토록 국록을 급여했고, 태종은 남몰래 그의 집 울타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장마 때 천장에서 비가 새자 ,우산으로 비를 막으며 부인에게 "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선 어찌 견디겠소“
라고 말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라고 쏘아 붙이자 류관이 껄껄 웃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류관은 벼슬자리에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호미를 들고 채소밭에서 김도 매고, 벌레도 잡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도 하던 일이라고 하니 그의 소탈함과 청백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은 류관이 벼슬자리에 있는 동안에도 그를 위하여 자주 음식과 물건을 보내어 그의 공을 치하했으나 세종임금이 보내는 맛있는 음식과 귀한 재물은 하루를 넘기기 힘들었다. 이유는 임금께서 어찬(임금님이 내리시는 음식)을 내리시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열었고, 아무리 귀한 임금님의 하사품 일지라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류관의 성품을 잘 아는 세종은 더욱 자주 하사품을 내렸다고 한다.
 
류관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뽐내지 않았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기의 편안함보다는 백성들을 생각하고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이런 류관의 유훈은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사물은 오직 청백이니, 대대로 이어 끝없이 전한다(吾家長物惟淸白 世世相傳無限人)”이다.
안장자묘역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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