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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달의 청렴인물
작성일 2016-04-01 조회수 104
▶ (임 광)외국에서 받은 선물을 바다에 던져버리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임광의 본관은 풍천으로 자는 자정. 사헌부감찰 익신의 아들이다.
광해군1년(1609)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재사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낙향하여 공직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순릉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을 거쳐 승정원주서, 성균관전적, 호조낭관, 병조낭관, 정언, 지평을 지냈으며, 지방수령으로 나가 함종현령과 영광군수를 지냈다. 다시 중앙관직에 돌아와 홍문관수찬, 사헌부장령이 되고 암행어사로 평안도지방에 내려가 지방행정을 바로잡았다.
또 균전사가 되어 영남지방을 돌아보고 토지행정을 바로 잡았다. 첨지중추부사로서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뒤 좌승지, 한성우윤이 되었다. 그때 남쪽지방에 소요가 있었으므로 삼남주사검찰사가 되어 삼도수군을 순찰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이 되고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하였다.
충주목사, 안동부사를 거쳐 1642년 황해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도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좌부빈객으로 김육과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환국하게 되었을 때 이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 대접받기를 거부했덕 조선의 백이(伯夷)
임광은 한결같이 법을 지키면서 절의를 꺾는 일이 없었는데, 다음 일화는 이러한 임광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임광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임광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인들은 갖가지 좋은 음식을 내놓으며 그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러나 임광은 아침 저녁으로 일본인들이 대접하는 음식은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이 준비한 보잘 것 없는 건량과 변변치 않은 반찬만을 먹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은 혹시 임광이 자신들의 대접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 그러는 줄 알고 그에게 물었다.
“공은 어째서 이곳에 와서 이렇게 변변찮은 음식을 드십니까? 저희가 이곳에 나는 좋은 것들로 만든 음식을 보내오니 사양치 말고 취하시길 바라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라의 일로 이곳에 온 것이지 대접을 받고자 하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공무를 모두 마치고 나니, 일본인들이 바친 쌀과 갖가지 음식들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임광은 남은 쌀과 음식을 문안 오는 일본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다. 이 소문이 일본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전해졌다.
“조선에서 온 이가 저희가 문안을 가면 음식을 내어 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관리는 크게 감탄하고 임광이 일본인들에게 다시 나누어준 쌀과 음식을 금 170근으로 바꾸어 보내었다. 그러나 임광은 이것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제발 받아주십시오. 저희가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면 저희 장군님께서 저희를 크게 벌하실 것입니다.”
임광은 금을 가져온 일본인들이 자신의 앞에 엎드려 애걸복걸하자, 어쩔 수 없이 금을 받았다. 그러나 임광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받은 금을 바다 속으로 모두 던져 버렸다. 지금까지 그 곳을 투금해라고 부른다.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두고 칭송하면서 “임공은 지금 세상의 백이이다.”라고 하였다.
‘백이’는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 은나라 말에서 주나라 초기의 현인으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고 했을 때 아우인 숙제와 함께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나라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다. 임광이 백이라 불리운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임광의 청렴함이 얼마나 철저히 보였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안장자묘역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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