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 유 당(與猶堂) ◀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馬峴)에 있다. 여유당은 지금은 팔당 호숫가의 외딴 집으로 남아 있지만 다산 당년에는 그윽한 강마을의 저택이었다. 이곳을 그 옛날에는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다산은 여기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다산은 1800년 정조 서거 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유당에서 칩거합니다. 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하다'는 뜻이고, '유(猶)'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의 뜻입니다. 겨울 냇물은 무척 차갑습니다.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것이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냇물을 건너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이 두려운 사람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항상 따르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산은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이 당쟁의 중심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했고, 그 아들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는 문벌과 당색의 타파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인재의 고른 등용을 역설했습니다. 그렇게 조심했던 다산이었건만 그는 결국 유배객이 되어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고, 나이 57세가 되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줄곧 여유당에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다산 선생이 사시던 여유당은 본래 주차장 입구였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고, 팔당댐이 생기면서 옛 마을은 모습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1975년에 현재 위치에 복원한 것이 지금의 여유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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