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시백의 용기와 소신 ◀ 이시백(李時白)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 아들로 선조 14년(1581)에 태어났으며, 용기와 소신으로 임금의 신뢰를 얻어 영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청빈한 선비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시백의 곳곳한 성품은 임금 앞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집 뜰에는 충정공 이귀가 나라에서 하사받은 한그루의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그 이름은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하였는데 그 꽃나무는 중국으로부터 온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일꾼을 데리고 찾아왔다. 이시백은 자신을 갑자기 찾아 온 연유를 물었다. 대답인 즉, 그는 대전별감(大殿別監 : 궁궐에서 심부름하는 벼슬)으로서 임금의 명을 받아 그 꽃나무를 캐어 가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꽃나무의 뿌리까지 뽑아내 버리고는 눈물을 떨구며 말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 어진 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하시려는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 모름지기 이 뜻을 아뢰라.”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어지러운데, 임금이라는 자가 한가하게 꽃나무나 구경하면서 소일하려 하는 것을 보아 넘기지 못한 것이다. 중국에서 들여 온 귀한 꽃나무를 임금에게 바쳤다면 임금이 매우 기뻐했을 것이고, 그는 더욱 쉽게 임금의 신임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시대에 임금이 가져오라고 한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자칫 그의 불경스러움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청렴하였던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간언을 한 것이다. 그 후 이시백에 대한 임금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는데, 세자와 함께 배석한 자리에서 “이 자를 보기를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대접하기를 나와 같이 하라.”하였다고 한다. 이는 충성스럽게 간한 이시백의 뜻과 청렴함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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