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기생을 물리치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시백의 본관은 연안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크게 놀라 뜰..."> ▶ 평양 기생을 물리치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시백의 본관은 연안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크게 놀라 뜰..." /> 국립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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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렴공감편지
작성일 2015-10-05 조회수 133

▶ 평양 기생을 물리치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시백의 본관은 연안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크게 놀라 뜰아래 부들자리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옛날부터 깔던 것이오. 내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외람되이 공경에 올랐으니,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기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써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오. 부들자리도 오히려 불안한데 하물며 비단방석이겠소.”하고 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부인이 부끄러워 사과하고 그 자리에서 비단방석을 뜯어 버렸다고 한다.
 그가 사신이 되어 중국 연경에 갈 때의 일이다. 가는 길에 평양에 이르렀는데, 대동문 밖에 기생이 한 무리를 이루고 서 있었다.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곱게 단장한 모습이 멀리서 보아도 빛이 났다. 본래 사신으로 중국에 가는 길은 영광스러운 기회지만 최소 3개월이 넘게 걸리는 오랜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고생스럽기도 하였다. 때문에 사신들을 위로하기 위해 개성이나 평양, 의주 같은 사신 행렬이 지나가는 큰 고을에서는 기생들을 대동하여 성대한 송별연을 베풀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시백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는 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시백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 “병자년 난리 이후에 서도가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이를 보니 크게 이상한 일이구나.”하며 화려하게 치장한 기생들을 지적하였다. 이에 평양서윤이 몸둘 바를 몰라 하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난리 후에 기생이라곤 오직 늙고 병든 자만 남아 있어 사신의 행차에 항상 체통을 지키지 못하므로, 이에 각 고을의 관비 가운데 자태와 재주가 있는 자를 선발하여 본부에 옮기고 또 그 친족들로 하여금 그 의복의 비용을 맡게 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서윤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이토록 어려운 시절에 이런 짓을 하다니 매우 놀랄 만한 일이구나.” 이새백은 매우 노하여 기생들을 뿌리쳐 돌려보냈다. 또한 감사를 불러 꾸짖기를 “지금 어찌 기생의 놀이를 베풀 때인가? 아뢰어서 죄를 벌하고 싶으나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터이니 모름지기 재촉하여 금일 내에 돌려보내되, 혹시라도 지체하여 어김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고 한다.
 이시백은 자신만의 청렴함으로 끝나지 않고, 나라의 잘못된 관례를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그가 지적한대로 당시는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들 때였다. 게다가 패전국으로서 청나라가 요구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포로로 잡혀간 수많은 백성들을 송환해 오는 몸값을 치르느라 국고가 거의 바닥이 나있는 상태였다. 이 때 백성들까지 동원하여 기생들을 데리고 연회를 하는 것이 이시백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 없었다. 이처럼 이시백은 나라의 잘못된 관례를 바로잡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신껏 행동한 청빈한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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