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에 있다 ◀


 정붕(鄭鵬)은 세조 13년(1467)에 태어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운정, 호는 신당으로 선산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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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붕(鄭鵬)은 세조 13년(1467)에 태어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운정, 호는 신당으로 선산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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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렴공감편지
작성일 2015-10-12 조회수 135

▶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에 있다 ◀


 정붕(鄭鵬)은 세조 13년(1467)에 태어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운정, 호는 신당으로 선산 출신이다.
 그는 천성이 매우 청렴결백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이렇듯 청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림 학맥의 도통을 잇는 길재․김숙자․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체화시키고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황도 일찍이 그의 학문이 깊고 행동에 기개와 지조가 있다고 칭찬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당시에도 유명하여 그의 집 문간에는 뇌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집에 양식이 없어 굶을 지경이 되어도 부정한 자의 재물을 꿔다 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연산군 때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사람 중 제일은 유자광이라는 인물이었다. 유자광은 적개좌리공신으로서 무령군에 봉해졌는데 간사하고 탐욕이 많으며, 또한 방자하여 그의 기세가 조정을 휩쓸었다.
 그런데 정붕은 유자광과 외가 친척이 되는 사이였다. 비록 문안하는 예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부득이하게 왕래할 일이 있으면 그가 반드시 해두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종이 갈 때에 반드시 숙마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묶은 자리에 표를 해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종은 묶인 곳이 아파서 그의 집에서 지체하지 않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여종이 돌아오면 비로소 그 끈을 풀어주었다.
 한편은 정붕이 출타했다가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져서 그의 부인이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의 부인이 생각다 못하여 유자광의 집에 가서 꾸어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자광이 흔쾌히 허락하며 말하기를,
 “친척의 정의는 서로 구휼하는 데에 있다. 정교리가 지나치게 괴팍하지만 내가 어찌 괄시하겠는가?”하였다. 그러고서는 곧 쌀을 자루에 넣고 장을 항아리에 담아 종을 시켜 노새에 실려 보냈다.
 부인은 쌀과 장을 가지고 가서 밥을 지어 상에 올렸다. 정붕이 옥같은 쌀밥과 구수해 보이는 장국을 보고 부인이 스스로 마련한 것이 아님을 짐작하고는 얻어온 곳을 물었다. 부인은 주저하면서도 사실대로 말했다. 공은 상을 밀치고 웃으면서 일어나, “어제 아침에 비지를 사다가 죽을 쑤어 주기에 나는 양식이 떨어진 줄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의 실수이지 부인의 허물이 아니오.” 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워 쌀과 장을 꾸었다. 그것으로 부인이 쓴 만큼을 채우고 남은 쌀과 합쳐서 유자광에게 돌려보냈다. 그는 궁핍해도 절대 지조를 버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유자광과의 일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연산군 때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유자광이 독약을 주머니에 넣어 보내며 말하기를,
 “공이 이번 걸음에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 같으니 가지고 있다가 자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하였다. 정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간수했다.
 얼마 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세상이 바뀌고 연산군 때 폭정에 맞서 간하다가 유배를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조정으로 돌아왔다. 정붕 역시 풀려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유자광이 귀양을 가게 되었고 정붕이 간수해 두었던 독약 주머니를 돌려주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예전에 당신이 나에게 준 것이오. 귀양 중에 꼭 필요할 것이니 이제 돌려 드립니다.” 하였다.
 정붕은 명분이 없는 일이라면 친구의 부탁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정붕이 청송 부사로 있을 때 그와 절친하게 지냈던 성희안이 편지를 보내 잣과 꿀을 요청했다. 청송은 산이 많아 잣과 꿀이 특산물이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해줄 수도 있는 것이고 이것은 당시 관리들이 흔히 하던 관행이기도 하였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중앙의 높은 관리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정붕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답하기를,
 “잣은 높은 산봉우이 위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에 있으니, 태수가 무슨 수로 얻겠소.”하였다. 성희안 또한 졸렬한 인간이 아니어서 이 편지를 읽고는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고 한다.
 정붕은 연산군 때의 권신 유자광과 외척 간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부와 권력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자광의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거나 영합하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며 산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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