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항복의 청빈과 소신 ◀


  이항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덕형과의 우정을 통해 우리에게는 오성과 한음으로 더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 ▶ 이항복의 청빈과 소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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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1-30 조회수 122

▶ 이항복의 청빈과 소신 ◀


  이항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덕형과의 우정을 통해 우리에게는 오성과 한음으로 더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수습책에 힘쓰기도 했다. 현재 서울 부암동에는 이항복의 별장 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으며,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딴 백사실계곡으로 부르고 있다. 이항복은 그의 나이 19세에 권율의 딸과 결혼하였다. 어릴 적 그의 재능을 알아본 권철이 그를 손녀사위 삼겠다며 일찌감치 점찍어 두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오는데, 담장을 넘어온 감나무의 감을 따먹으려는 항복에게 권철의 하인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넘어온 감이라 못먹게 하자 권철의 방안으로 주먹을 뻗어 구멍을 내버린 이야기가 있다.
 이항복은 많은 벼슬살이를 했지만 그에 맞지 않게 셋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권력과 부, 명예가 대대로 세습되던 조선시대에 이처럼 청빈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가히 청백리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항복이 지방으로 내려간 뒤, 당시 조정에서는 이항복에게 그 지역 반역의 낌새에 대해 찾아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이항복은 “역적은 날짐승, 들짐승이나 물고기처럼 특산품이 아니라서 찾기 어려운 것이다.”라는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이항복이 의금부에서 역모 조사에 참여할 때 이춘복이라는 역적을 잡아 오라고 시켰는데, 이춘복이 없어 이원복이라는 비슷한 이름의 사람을 잡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놈이 그놈이니 벌을 줘야겠다는 결론이 나는듯하자 이항복은, 자신의 이름도 비슷하니 자신부터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 말하였고, 이로서 이원본은 무죄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속에는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대북파를 풍자한 이야기라는 속설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안장자묘역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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